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마 김대두는 1975년 8월 13일 새벽 0시, 전남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의 한 외딴집에 숨어들어 자고 있던 노부부를 습격해 낫으로 살해했습니다. 노부부의 부인은 절굿공이로 때려 중상을 입혔으며, 집에서 손전등 하나를 훔쳐 가지고 도망 나왔습니다. 그는 두 달여 동안 16명을 더 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김대두는 유영철 이전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남긴 연쇄 살인마입니다.

김대두는 논 4마지기와 밭 1000평을 가진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는 그를 대도시의 이름난 중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했을 만큼 교육열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김대두는 학업에 뜻이 없었습니다. 그는 큰돈을 벌고 싶어 일찍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농촌 출신 저학력자에 기술도 없고 왜소한 그에게 사회는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농촌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을 겪고 난후 참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랐는데 주위를 보면 논 1000평도 못 가진 사람이 허다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래도 열심히 일하며 순박하게 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가난과 범죄를 연결 지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열등감에 빠진 김대두는 범죄의 길로 빠져들어 폭력 등 범죄에 휘말려 전과 2범이 됐습니다. 출소 후에는 공장을 전전했으며, 전과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불만을 키웠습니다.

광산군의 외딴집에서 시작된 살인은 전국으로 옮겨져 9차례나 이어졌습니다. 같은 달 19일 기차에서 우연히 같은 교도소에 복역했던 재소자를 만난 그는 전남 무안군에 있는 한 구멍가게를 습격해 노부부와 7살 손자를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곳에서 빼앗은 것은 단돈 250원과 빵, 음료수, 과자. 둘은 "이왕 죄를 지을 바에 돈이 많은 서울에서 하자"며 다시 기차에 올랐으나, 얼마 못 가 헤어졌습니다.

김대두는 경기도의 주로 외단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 당시 경기도는 지금 처럼 개발되지가  않았고  집도 뜨막뜨막 있는 산골 한적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김대두는 경기도의 한 노부부의 집에 들어가서 배고프다고 했습니다. 인정 많은 노부부는 그에게 밥을 지어 한상 차려 줬습니다. 그 밥을 먹고 나서 그는 노부부를 죽였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습니다.

김대두는 골프장에도 잠입했습니다. 한동안 골프장 캐디들도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캐디는 몹쓸 짓을 저지르려는 김대두에게 납치되어 운동화 끈으로 나무에 손이 묶였습니다. 다행히 그 캐디는 지니는 차량이 있어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당시 김대두의 연쇄 살인으로 인하여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마 정남규 때 처럼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당시 시골집들은 지금과 달리 초가집도 많았었고, 대다수 문의 잠금장치도 없었고, 있다손 처 봐야 창호지 바른 문짝에 동그란  고리하나 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또한 지나는 과객, 길손이 밤이 늦어 아무 집이나 방문하면 재워주고 아침 상을 차려 먹여 보내는 관습이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지나는 길손이 밤늦게 찾아와 재워 달라고 하여 재워주고 어머니께서 아침 상 차려 먹여 보내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이불에 오줌을 싸고서 새벽같이 도망갔다고도 합니다.

김대두는 혼자 칼과 망치, 돌 등으로 강도 살인 및 성폭행을 이어나갔습니다. 그해 9월7일 서울 동대문구 면목동(현 중랑구 면목동)에서 혼자 사는 60대 남성을 살해했으며, 보름 만인 25일엔 경기 평택군(현 평택시)에서 70대 노인과 그의 딸(40), 손주 셋(5살, 7살, 11살)을 차례로 살해했고  11살 손녀는 나무에 묶어 성폭행하기도 했습니다. 피해자 모두 망치로 살해당했는데, 얼굴이 심하게 훼손돼 있었습니다.

이후 김대두는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8명을 더 살해했고, 심지어는 생후 3개월 된 아기의 생명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김대두는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젖먹이를 죽인 건 우는 소리가 귀찮았다. 처음 전남 광산서 살인하고 나니 그 후로는 사람 죽이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고 말했습니다.

김대두는 범행 두달 만인 10월 7일 피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김대두가 9차례 강도 살인을 저지르면서 빼앗은 돈은 2만 6800원에 불과했고 1975년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만 8600원쯤 했으니, 지금 돈으로 치면 겨우 몇십만 원을 빼앗기 위해 17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김대두는 체포 이후에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장검증에서 "빨리 끝내자"며 신경질을 부리고 히죽히죽 웃거나, 껌까지 씹어 분노를 안겼습니다.

김대두는 당시 취재진에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빛은 많은데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며 범행의 책임을 사회로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범죄자의 전형적인 남 탓, 사회 탓입니다.

김대두의 변호인도 마지막 변론에서 "피고인은 집단에 대한 귀속의식이 충족되지 못했다. 사형제도 폐지론의 조류에 따라 실증적인 하나의 연구로써 피고인에게 무기 징역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김대두는 1심과 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상고를 포기하고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선고 당시 에피소드로 김대두는 사형 판결이 나오니 얼굴이 하얘지며 졸도 지경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잔인무도 하고 남의 목숨을 하찮게 끊어 놓는 자도 자기의 생명과 연결되면 크나큰 충격을 받는 걸 보면 사형이 집행된다면 살인이 줄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대두의 범행 일지 : 살인 17명

1. 1975년 8월 13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잠을 자고 있던 노부부를 습격하여 도망치려는 남성을 낫으로 살해하고 절구의 공이로 부인을 때려 중상을 입힌 뒤 손전등 하나를 훔쳐 도주. 2명 살해

2. 1975년 8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의 한 구멍가게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노부부와 7살 손자를 살해한 뒤 250원을 훔치고 가게의 과자와 음료수, 빵 등을 무전취식. 3명 살해

3. 1975년 9월 7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현 중랑구 면목동)으로 올라와 친척 누나의 집에 머물던 도중 근처에서 홀로 집에 거주하던 남성(60)을 살해. 1명 살해

4. 1975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현 평택시)에서 할머니(71)와 딸(40), 손주들을 습격하여 5살, 7살, 11살 손자 손녀 포함 일가족 5명을 살해. 11살 손녀는 집 밖의 나무에 묶여 강간 시도 후 살해당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다른 4명의 희생자들은 망치로 살해당했는데 장도리의 손잡이가 부러질 정도로 내리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됨.  5명 살해

5. 1975년 9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현 구리시)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20대 부부와 자녀인 3살 아기 등 3명을 살해하고 아내의 모친과 할머니 등 2명에게 상해를 입힘. 3명 살해, 2명 중상

6. 1975년 9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현 군포시)에서 생후 3개월 된 여자아이와 그녀의 어머니(28)를 습격하여 어머니는 강간한 뒤 살해하였고 아이는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둔기로 내리친 뒤 짓밟아 장 파열로 숨지게 하고 집에서 2300원가량을 훔쳐 도주. 2명 살해

7. 1975년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에서 30대 부부를 습격하여 남편(38)을 그 자리에서 둔기와 칼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숨지게 하였으며 아내(37)는 옷을 벗겨 나체로 집 밖의 야산으로 끌고 나가 양손을 결박한 뒤 살해. 2명 살해

8. 1975년 10월 3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여성(21)을 습격하여 강간을 시도하였으나 피해 여성이 지나가는 차량을 보고 도움을 요청해서 상해를 입히는 데 그침. 1명 상해

9. 1975년 10월 7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공범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남성 1명을 살해. 1명 살해

 

출생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167

생년 :1949년 11월 17일

사망 :1976년 12월 28일 (27세)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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