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2년 전 대구에서 실종된 여중생들이 성매매 업소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아직 살아있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며 대구 여중생 실종 미제 사건을 재조명했습니다.

지난 2001년 12월7일 자정쯤 여중생 민경미, 김기민은 택시를 탔다가 실종됐습니다. 민경미의 어머니는 "당시 만 15세면 아동이 아니기 때문에 실종신고가 아니라 가출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북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 것 같다"고만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터미널에는 늦은 시간에 다니는 버스는 없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왜 애들이 터미널에서 내렸는지 모르겠다. 가출을 할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친구들도 "갑자기 가출할 이유가 없다"며 의문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민경미가 행방이 끊기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메일에도 가출을 암시하는 흔적은 없었고, 김기민 역시 친구와 졸업 파티와 같은 일일 찻집에 가기로 약속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실종 전날 민경미, 김기민을 만난 친구는 "두 사람이 차가 있는 아는 오빠와 시내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기억했습니다. 해당 차를 목격한 다른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따르면 김기민의 어머니는 "실종 사건 보름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엄마, 나 좀 살려줘! 살려 줘! 부산역에 있다'고 말한 뒤 전화가 끊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종 3개월 뒤인 이듬해 3월쯤에는 민경미의 친구가 메신저에서 "친구야 무섭다. 나 좀 찾으러 와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민경미의 당시 남자친구 또한 "어떤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경미 새 남자친구라고 하더라"라며 연락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신박진영 전 대구여성인권센터 대표는 "너무나 유사한, 그때 봤던 그런 만행들이다. 시대상으로 보면 성매매 업소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너무 높아 보인다"며 성매매 피해자 사례와 유사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윤서 부산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소장은 "(성매매 피해 여성) 10명에게 전화했을 때 3~4명은 '나 어렸을 때 그랬다. 그렇게 해서 집결지에서 처음 일했다'고 하더라. 아는 오빠가 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놀다가 나를 데리고 갔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 내렸더니 거기가 집결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의 목적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경제적인 이유로 발생한 사건인 것 같다"며 "두 사람이 사망해 암매장이 돼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들이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표창원 범죄심리분석가 역시 "학생 둘이 만약 살해당했다고 한다면 시신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정황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어딘가에 아직은 살아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범죄 전문가들이 살아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제발 살아있길 빕니다. 대구 경찰청에서도 미제 사건으로 다시 들여다 보고 수사를 펼치고 있다니 꼭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저는 학업을 위하여 어린 시절 전학하며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고향이 그립고 가끔 들리는 고향 소식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됩니다.

오래 전 풍문으로 들은 고향 소식에 이웃에 살던 언니뻘 되는 분이 사창가로 팔려가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동네 처녀 여러 명이  팔려 갔는데 다른 분들은 어찌하여 도망쳐 나왔는데  그분은 혼자 그곳에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인은 연탄가스로 사망했다고 하나 들리는 얘기로는 맞아서 죽지 않았나 하며 몸에 맞은 흔적이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경찰조사도 보상도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연탄가스로 죽었다 하여 가족들이 가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그런 사태에도 그냥 그렇게 처리되곤 했습니다. 

그 시절 가정 살림이 어렵던 동네 처녀들은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됨)를 졸업하던지, 아예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집안일을 거들다가 열댓 살 정도 되면 도시 가정부로 가기도 하고 몇 명씩 모여서 도시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몹쓸 사람에게 낚여서 사창가로 흘러들어 갔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어린 시절에 본 것 중 잊히지 않고 지금까지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 아저씨는 우리 집 우물로 물을 길어 자주 오시곤 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아내가 물 긷기 힘들다고 꼭 자기가 물을 길어다 주는 애처가 남편이었습니다. 동네 아저씨들은 몇 명씩 조를 짜서 노동을 가곤 했는데 노동하다가 사고가 나서 사망했습니다.

그 집이 방 한칸이니 아이도 있고 하여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어서 집옆 밖에다가 홑이불을 덮어서 몇 날을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다녀오니 동네 분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일본으로 부터 해방한 지 얼마 안 됐고 바로 6.25 침략 전쟁 후로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일하다 사고로 사망해도 사창가에서 맞아 죽어도 보상도 없고 따질 데도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아오면서 피 눈물만 흘려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적 역량은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 매고 밤 낮 없이 일하며 노력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 땀과 희생, 눈물을 딛고 눈부시게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여 작금에 이른 것입니다.

실종된 두분 살아 계시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꼭 연락하여 눈물로 기다리는 가족 품으로 돌아오세요. 친구들이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살아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