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 어부 오 씨는 2007년 8월 31일과  이어 1달도 채 안된 9월 25일 두건의 살인 사건을 저질러 젊은 남녀 4명을 살해했습니다.  나이 70의 노인이 비뚤어진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려고 꽃다운  젊은이들의 목숨을 무참하게 빼앗은 오 씨의 사건으로  당시 사회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보성 어부 오 씨 사건으로 2008년 여름 그의 40대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외지에 살던 큰 아들은 “부친의 범죄로 충격받고 괴로워하다 아파트에서 투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보성 어부 살인사건’의 70세 오종근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가 오 씨의 처도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곱창집 하는 딸네 집으로 갔고 오 씨의 2남 5녀 중 유일하게 보성에 살던 딸은 사건 직후 “아버지고 뭐고, 그런 짓을 한 사람과 난 상관이 없다. 이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큰아들도 사건 나고 바로 죽어버렸다”고 소리치며 가족 모두가 오 씨를 버렸습니다.

오 씨는 큰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1년 전쯤인 2007년 8~9월 전남 보성 득량만 해상에서 2차례에 걸쳐 20대 대학생 커플과 20대 여성 2명 등 4명을 살해했습니다. 바다 구경을 온 이들을 배에 태워 성폭력을 저지르려다 물에 빠뜨려 죽인 것입니다.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물에 걸려 올라와 복원된 대학생 추양의 카메라에 범행 전 오 씨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 씨는 그해 8월 31일 오후 보성군 회천면 한 선착장에서 여행을 온 피해자 김 모(당시 19세)군·추모(당시 19세)양을 바다 구경 시켜 준다며 자신의 1t짜리 주꾸미 배에 태우고 어장이 있는 득량만 바다로 나갔습니다. 교제 중인 두 대학생은 “배로 바다를 돌고, 내 어장도 구경시켜 주겠다”는 말에 의심 없이 배에 올라 탔습니다.

두 사람이 배에 오른 후 30분쯤 바다로 나가자 오 씨는 추양에게 흑심을 품고 배를 멈춘 뒤 뱃전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둘 뒤로 몰래 가서 김 군을 양손으로 붙잡고 물속으로 밀어버렸습니다. 김 군이 허우적거리며 배에 오르려고 하자 쇠 갈고리가 달린  2m짜리 삿갓 대라는 어구로 수도 없이 내리치며 찍어댔습니다. 오 씨의 공격은 머리와 다리 등 무차별 공격이 이어졌고 그러면서 김 군은 익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어부 오 씨의 범행장면을 보면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추양에게 “아가씨, 가슴 좀 만져보자”고 하면서 대들어서 추양은 두 손으로 오 씨의 손을 쳐내며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오 씨는 결국 추양의 가슴과 다리를 움켜쥐고 바다에 밀어 빠뜨리고 추양이 배에 다가오자 또 삿갓대로 계속 밀쳐내 숨지게 했습니다.

오 씨는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25일 오전 11시 30분쯤 인근 선착장에서 23세의 간호사 안모 씨와 친구 사이인 24세 회사원 조 모 씨를 배에 태웠습니다. 인천과 시흥에 사는 친구 사이인 두 여성은 추석을 맞아 여행을 왔다가 “배로 바다를 구경시켜 주겠다”는 오 씨의 말에 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은 오 씨가  노인이기 때문에 그냥 인자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며 경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두 여성을 득량만 해상을 구경시킨 뒤 오후 들어서자 먼바다에서 배를 멈췄습니다. 이어 안 씨에게 다가가 “아가씨, 가슴을 만져도 되나”라며 손으로 안 씨의 가슴을 만지려고 했으나 안 씨는 오 씨의 손을 쳐내며 반발했습니다. 조 씨도 합세하여 오 씨의 몸을 붙잡고 저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 씨는 안 씨를 배 바닥과 선실 등에 부딪히게 한 뒤 바다로 밀어 빠뜨렸습니다. 이어 조 씨 목을 조른 뒤 선실 등에 처박고 바다로 밀어 숨지게 했습니다. 안 씨가 배에 오르려 하자 삿갓대를 휘두르며 못 오르게 하였습니다.

오 씨는 첫 번째 범행 이후 평범한 일상을 이어오다가 두 번째 살인에서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안 씨가 살해되기 직전인 오후 3시 36분쯤 육지에 있을 당시 전화를 빌려준 일이 있는데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 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 보트 좀 불러주세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안 씨가 오 씨 배를 타기 전에  30대 여성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줬는데  그 여성이 남편에게 전화를 했으므로 거기에 찍힌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자는 전화기 빌려줬던 여성의 남편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같이 있던 그 여성은 이상한 생각에 즉시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두 여성이 탄 배를 확인하고 선주인 오 씨를 찾아갔습니다. “내 나이 칠십이다. 여자 두 명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태연히 말했습니다. 경찰은 그의 배 수색에 나서 1차 피해자인 여대생 추양의 신용카드, 볼펜, 머리끈 등을 찾아냈습니다. 추양의 시신은 살해된 지 사흘 만에, 남자 친구 김 군의 시신은 닷새 만에 각각 발견됐지만 단순 실족사나 동반자살로 종결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대학 1학년 생인 젊은이 둘을 살해하고도 오 씨는 아무 일이 없었던 듯 버젓이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자식들이 출가하거나 외지로 나간 뒤 아내와 함께 보성읍에서 살면서 버스를 타고 회천면으로 가서 주꾸미잡이를 하면서 생계를 잇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긴급 체포된 오 씨는 “안 씨가 오줌을 누려고 선미에서 선수 쪽으로 가다 실족해 바다에 빠졌고, 조 씨가 이를 붙잡으려고 하다가 함께 물에 빠졌다”고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1차 범행도 “파도가 높이 쳐 바다에 둘 다 빠졌는데 구하지 못했다”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추양의 디지털카메라가 한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오고, 119와 통화한 내용이 드러나자 범행을 자백했습니다. 추양이 119에 건 네 번째 통화에는 “어따… 하냐” 고 말하는 오 씨의 음성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따 어디다 무전을 치냐"로 보도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 군 시신은 양쪽 발목과 어깨·팔이 부러지거나 찢어지고, 조 씨 시신에는 목 졸림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 씨는 범행이 들통나자 “내 배를 탄, 공짜로 얻어 타려 한 걔들이 잘못이다”고 황당한 변명을 늘어놨습니다. 그는 IQ가 73으로 측정됐으나 재판부는 “고령과 ‘무학’(초등 2년 중퇴) 탓으로 보인다”며 “지각과 기억력 등 정신에 특별한 장애가 없고, 키 165㎝의 왜소한 체격에 당시 한국식 나이로 70세 고령이지만  오랜 세월 어부로 일해서 힘은 젊은이 못지않은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배는 파도와 사람의 움직임에 쉽게 흔들려 익숙하지 않으면 젊은이도 힘쓰기 어렵기 때문에 오 씨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공간이었다며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그는 1심부터 대법원까지 ‘사형 선고’가 이어졌습니다. 1심이 끝나자 오 씨 측은 사형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고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5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재가 1996년 7대 2로 합헌 결정한 이후 두 번째 사형제 합헌이었습니다. 항소심을 맡은 광주고법은 오 씨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광주고법은 2010년 3월 “두 번째 범행은 추행 목적으로 피해자들을 더 외진 선착장으로 유도해 승선시킨 뒤 젊고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 유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도 오 씨는 태연히 생업에 종사하고 허무맹랑한 변명을 늘어놓아 더 큰 고통을 안기고 있다”며 “오 씨에게서 개전의 정이나 향후 건전하게 사회 복귀할 수 있는 교화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고 항소를 기각, 1심의 사형 선고를 유지했습니다. 

대법원(주심 안대희 대법관)은 그해 6월 “사형 선고의 양형 기준이 아무리 엄격하다고 해도 사형제가 존치하는 한 오 씨의 범행에 상응하는, 즉 영원히 사회와 격리하는 극형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밝혔습니다. 오 씨는 현재 미집행 사형수 59명 중 최고령으로 광주교도소에서 17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바다생활을 하다 몇십 년간 쭉 어부생활을 해온 오 씨가 과연 밝혀진 두건  4명만 살해했겠습니까. 오 씨는 우리 나이로 86세입니다. 오 씨의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 씨가 자연사하기 전에 철저히 조사하여 만에 하나 있을 가능성이 있는 여죄를 캐서 묻힌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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